[이 아침에]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4.07.01 18:28 수정 2024.07.01 18:29
둔한 2등이 되어보자
이정아/수필가
신장 이식 수술 후 정기검진차 한국에 나갈 때, 마침 국제 펜클럽의 '세계 한글 작가대회' 날짜가 맞물려서 참석하게 되었다. 경주에서 열린 작가 대회에는 한국, 중국, 러시아, 남미, 미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한글로 문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었다. 공부와 담쌓은 나는 수업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국에서 쓰던 전화기가 고장이 났기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핑계김에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세미나 도중 나와 경주시내 KT 고객센터에 갔다. 유심(USIM) 칩에는 문제가 없으니 전화기를 고쳐야 하는데 경주에는 애플스토어가 없어 포항엘 가야 한단다.
나를 태우고 다니던 택시기사님의 조언으로 중고 전화기를 사기로 하고, 대신 시내관광을 했다. 대학 때 수업을 빼먹고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탄 기분처럼 설렜다. 경주 시내관광은 거의 무덤을 보는 거였다. 박혁거세를 비롯한 박 씨 왕가의 오릉에서 천마총 등 30기의 대릉원을 보다가 마지막코스로 교동 최부자집을 가보게 되었다.
지루한 무덤들 보단 스토리가 있는 그 집이 흥미로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12대째 내려오던 부잣집 아닌가? 어마 어마한 크기의 곳간도 보고 간판에 쓰여진 최부잣집 가정경영 6훈과 지침도 흥미롭게 읽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만석이상 지니지 마라.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에는 땅을 사지마라.
5. 며느리들은 시집 온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부자의 자존감을 느낄 수 있었다. 흉년 당시에 개방했다던 뒤주도 보았다. 누구나 곡식을 퍼갈 수 있게 구멍을 뚫었으되 적당량만 허락한 사이즈여서 무척 현명한 구제를 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사랑채의 방마다 현판이 붙어있었는데 어려운 한문이어서 당시엔 읽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얼마전 복효근 시인이 경주여행을 다녀오시며 쓴 여행기를 읽었는데 현판에 대한 설명을 읽게 되었다. 그중 인상적인 편액이 ’둔차(鈍次)’였다. 둔차란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이라는 말이지만 ‘어리석은 듯 버금감’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독립유공자인 최부잣집 12대 손 최준의 부친 최현식 공의 호인데 가훈으로 삼았다고 했다. 직역하면 ’ 둔한 2등’ 으로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에 ‘둔한 2등’을 고집하는 겸양의 정신. 1등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2등이 아닐까? 정말 배우고 싶은 2등의 지혜이다. 모든걸 다 아는듯 앞장서 나대지 말고, 뒷전에서 묵묵히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2등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