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32

가을이 오면

[이 아침에] [Los Angeles]중앙일보 미주판 입력 2024.09.05 18:28 가을이 오면 9월이 되었습니다. 입추가 지났고 추석이 다가 옵니다. 본격 가을이 시작되겠죠. 큰 명절을 앞둔 이맘때면 한국에 있는 그리움의 존재들을 생각합니다. 부모님 모두 작고하시고 한국엔 남동생 셋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뿐인 누이는 멀리 미국에 이렇게 떨어져 산 지 오래입니다. 해마다 추석즈음엔 한국에 나가거나, 못 가면 추석을 쇠시라고 어머니께 약간의 송금을 하곤 했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세 동생들은 부모님을 합장한 묘소에서 추도예배를 드리고, 오는 길에 식당을 정해 함께 식사하더군요. 요즘 세태에 맞는 방법인 듯합니다. 저는 세 동생 집에 엘에이 갈비를 보내는 것으로 추석선물을 대신합니다. 마침 제가 엘에이 ..

나의 이야기 2024.09.06

방심

방심(放心) 이정아 팬데믹동안 조심조심 살았다. 사람 모이는 곳엔 안 가고 심지어 교회에 가서도 환자실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고 나름 신경을 썼다. 나처럼 장기 이식을 한 환자들은 일반인들에게 특효인 코로나 치료제 Paxlovid 도 쓰질 못해서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치의가 늘 강조한 발병 이전의 예방수칙을 준수했다. 주치의는 텃밭 가꾸기도 흙에 균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팬데믹이 해제되자 연주회다 강연회다 전시회다 다들 몰려가도 몸을 사리고, 2-3년 발길을 끊다 보니 그게 인생의 큰 몫을 차지하는 게 아닌 듯 생각이 들어 아쉽지 않고 덤덤해졌다. 팬데믹이 가져다준 선물인 ‘혼자 놀기’에 익숙해졌다. 아이패드 하나만 있으면 유튜브로 음악회도 전시회도 영화도 책 읽기도 다 가능한 ..

나의 이야기 2024.08.10

둔한 2등이 되어보자

[이 아침에]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4.07.01 18:28 수정 2024.07.01 18:29 둔한 2등이 되어보자 이정아/수필가 신장 이식 수술 후 정기검진차 한국에 나갈 때, 마침 국제 펜클럽의 '세계 한글 작가대회' 날짜가 맞물려서 참석하게 되었다. 경주에서 열린 작가 대회에는 한국, 중국, 러시아, 남미, 미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한글로 문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었다. 공부와 담쌓은 나는 수업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국에서 쓰던 전화기가 고장이 났기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핑계김에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세미나 도중 나와 경주시내 KT 고객센터에 갔다. 유심(USIM) 칩에는 문제가 없으니 전화기를 고쳐야 하는데 경주에는 애플스토어가 없어 포항엘 가야 ..

나의 이야기 2024.07.02

강림하다.지름신

[이 아침에]강림하다. 지름신 [Los Angeles] 미주중앙일보 입력 2024.06.05 17:48 플러그 네 개를 끼울 수 있는 콘센트(power outlet)를 샀다. 보통 전기에 관한 물품은 남편이 사지만 리모트 컨트롤의 배터리 같은 것은 동네 편의점에서 내가 살 때도 있다. 내 방 화장실에서 전동칫솔, 워터피크,헤어드라이어를 쓰려는데 이걸 빼고 저걸 끼우고 하려니 귀찮아서 네 구멍 짜리 콘센트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새 걸 턱하니 끼우고 보란 듯이 불렀더니 “오호라~ 제법인데, 나 없어도 살겠네 “ 하며 과한 칭찬을 한다. 그런 소소한 건 앞으로 스스로 해결하라는 싸인인 듯싶었다. 한껏 고무되어서 시키지도 않은 정원가위, 과일나무 지지대, 모종 보호 커버, 과일 열매용 봉지, 블루베리 나무용 ..

나의 이야기 2024.06.06

과거완료형 행복

[Los Angeles]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4.05.12 16:51 [이 아침에]과거완료형 행복 이정아/수필가 이곳은 어머니날, 아버지 날이 따로인데 한국은 ‘어버이날’이라고 떠들썩합니다. 미뤄두었던 효도를 한 방에 해 치우려는 듯 줄줄이 돈이 달려 나오는 머니 케이크에 미슐랭 식당 외식에 자손들과 부모들은 경쟁하듯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며 자랑합니다. 2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21년에 어머니가 소천하셔서 이젠 어머니 날도 아버지 날도 다 부질없는 노릇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한국의 어버이날은 빠르고 이곳의 어머니날은 느려서 그 시차를 못 기다리시고 늘 전화로 어머니날 송금했냐? 조급한 확인 하시곤 했었죠. 남편 보기에 부끄럽던 그 물질추구의 품위 없던 채근이 어머니가 안 계시니 ..

나의 이야기 2024.05.13

우리 이제 심안으로 만나자

[이 아침에] 우리 이제 심안(心眼)으로 만나자 [Los Angeles] 중앙일보 입력 2024.03.31 19:00 수정 2024.03.30 22:48 그녀와 나는 오래전 교회에서 만났다. 아니 그보다 전 한국에서 먼저 만났다. 나를 보고 국어선생님이셨죠? 하는 걸 보면 공부엔 별 관심 없었던 듯하다. 나는 가정과목을 가르쳤고 내 기억에도 그녀가 뚜렷이 남아있지 않으니 서로 그렇고 그런 학생과 선생 사이었나 보다. 그래도 이역만리에 이민 와서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그 인연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불가에서는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7000겁, 부모와 자식이 되기 위해서는 8000겁, 형제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9000겁, 그리고 스승과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려 1만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

나의 이야기 2024.04.01

금귤이 만든 인심

[이 아침에] 터줏대감 [Los Angeles]중앙일보 미주판 입력 2024.02.15 18:52 수정 2024.02.15 19:52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인데 요즈음엔 이 말을 모르는 사람도 있고, 이웃이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한국 뉴스를 보면 이웃끼리 층간소음이니 주차문제로 서로 다투고 소송을 하기도 한다니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사는 중이다. 우리 집엔 금귤나무가 12그루가 있다. 흔히 낑깡이라 부르기도 하고 영어로는 Kumquat(쿰콰트)라고 한다. 껍질째로 먹는 새콤 달콤한 과일로 특히 비타민 C가 많고 칼슘도 많다. 쿰콰트를 뒷마당에 여섯 나무를 심고 차고 옆 울타리에 여섯 주를 심었다..

나의 이야기 2024.02.16

공룡을 만들다 든 생각

[이 아침에] 공룡을 만들다 든 생각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4.01.23 19:09 수정 2024.01.23 20:09 이정아:수필가 펜데믹동안 집에 있는 무료한 시간에 뜨개질을 했다. 목도리, 가방, 수세미등의 큰 기술이 필요치 않은 소품들이었다. 아들아이에게 목도리와 수세미를 나눠줬더니 내가 뜨개질에 큰 취미가 있는 줄 알고 아들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Jurassic Park 공룡 뜨기 세트가 왔다. 난감했다. 단순한 시간 킬러용 취미에 의미 부여할 일이 아닌데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갖은 공룡인형 이라니 말이다. 며칠째 뜨기 안내 책자만 들여다보고 머리 아파하고 있는데 아들이 전화했다. 잘 되고 있느냐고. 뭐라도 하나 만들어 보여줘야 될 입장이 되었다. 티라노사우루스, ..

나의 이야기 2024.01.24

소나무 시대가 가고 올리브 나무가 왔다

[이 아침에]소나무 시대가 가고 올리브 나무가 왔다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4.01.01 17:58 수정 2024.01.01 18:58 이정아 오래전에 풍수를 잘 아는 이로부터 집 앞에 소나무가 있어야 학생은 공부운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점사가 아니라 풍수지리여서 크리스천인 나도 별 거리낌이 없이, 그렇다면 소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 생각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라든가 ‘불로장생’의 의미로 한국인과는 이미 친근한 소나무가 아니던가? 거기에 다가 소나무의 꽃말은 '굳셈'이라니 언제, 어디서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굳세게 해결해 나가고 열심히 공부해 어려운 이웃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는 의지를 상징하고 있다고 나무 심을 때 아이에게도 일러주었다. 내심 아들아이의 공부도..

나의 이야기 2024.01.02

땅 위의 위로

[이 아침에]땅 위의 위로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3.11.29 17:40 수정 2023.11.29 18:40 이정아/수필가 추수감사절 연휴를 지낸다고 3박 4일 빌린 맘모스 빌리지의 콘도에서 하룻밤만 자고 내려왔다. 호흡곤란이 와서 한숨도 못 잤다. 고산병이었다. 몇 년 전 수술직후 약한 몸으로 갔을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 또 숨쉬기가 어려웠다. 하루정도 지나면 적응된다는데 고통의 밤을 다시 견디기 어려워서 남편을 졸라 하산했다. 마침 둘째 날 아침 스노보드를 타던 남편도 과하게 욕심을 내다가 타박상을 입어 갈비뼈에 통증이 왔다. 의좋게 내려올 수 있어 덜 미안했다. 아들내외와 후배내외의 근심을 뒤로한 채 내려왔다. 평소 잘 맞지 않는 우리 부부인데 나는 고산병으로 호흡이 어렵..

나의 이야기 202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