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44

무뚝뚝한 하이디

[이 아침에]무뚝뚝한 하이디미주중앙일보 07-07-2025 19:35 입력이정아/수필가호텔에 체크인할 때 조식도 함께 예약을 해서 인터라켄의 호텔에서 4일간 스위스식 아침을 먹게 되었다. 아메리칸 브랙퍼스트와 별다르진 않았는데 유럽 답게 빵과 치즈가 다양했다. 식당 서버들은 대부분 아주머니들로 어려서 읽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중년버전 같았다.이 하이디들은 어찌나 성실한지 멀리서 보고 있다가 그릇이 비면 새것으로 바로바로 교체를 해주어 공연히 미안했다. 하는 품새도 절도 있는 군인 같아서 먹는 우리도 빨리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었다. 흔한 달걀 프라이가 없어서 의아했는데 그건 하이디에게 주문하면 주방에서 바로 만들어주었다.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시작하는 미국의 호텔 조식뷔페..

나의 이야기 2025.07.08

역지사지의 인생

역지사지의 인생이정아/수필가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오, 천사로구나!” 생쥐의 눈에는 날개 달린 박쥐가 천사로 보일 수 있겠구나 하고 실소했다. 2016년 91세를 일기로 작고한 프랑스 작가 미셸 트루니에의 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쥐들이 아닌 인간세계에서도 종종 이런 착각을 한다. 모두들 자기 처지나 입장에서 사물과 현상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남을 판단함으로 인해 자주 부딪치게 된다. 오죽하면 인간은 마음속에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두 마리 개를 키우며 산다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며 살아야한다. 그 역지사지란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가게에서 일하는 두 ..

나의 이야기 2025.07.03

우당탕 결혼기념 여행

[이 아침에]우당탕 결혼기념 여행[Los Angeles]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6.04 04:39이정아/수필가다리가 부실해서 오래 걷기가 힘든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남편이 결혼기념여행계획을 짜면서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서 무심히 ‘스위스’라고 했다. 그 대답에 코가 꿰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을 지나 스위스 인터라켄까지의 길고 복잡한 여행을 하게 되었다.남편을 외삼촌이라 부르는 시댁조카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고, 고모부라 부르는 친정조카를 암스테르담에서 만나서 인사하고 교제하고 그 아이들의 피앙세도 면접(?)하고 오는 길은 간단한 길이 아니었다. 직항으로 목적지에 가서 호텔에 체크인하는 것도 힘든 몸이 비행기와 기차와 우버를 번갈아 타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전동 스쿠터를 가져가서 큰 도움이..

나의 이야기 2025.06.05

당근거래를 해보니

[이 아침에] 당근거래를 해보니[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5.08 20:32 이정아/수필가미국에서 구입한 첫 집에서 37년째 살고 있다. 요령이 없는 것인지 능력이 없는 것인지 집을 늘려가지도 바꾸지도 못하고 산 지 오래되었다. 아들아이가 결혼하고 독립하여서 더 넓은 집이 이젠 필요하지도 않다.세월만큼 살림살이도 쌓여, 버려야 할 허섭스레기도 산과 같다. 버리자니 정이 들어 버린다 버린다 하며 끼고 살았다. 친정 엄마 돌아가신 후의 심란했던 엄마의 짐정리가 생각이 났다. 크지 않은 아파트에 장롱마다 광마다 가득했던 물건들은 분류에 지쳐 동생이 비용을 써가며 새 물건조차 모두 버렸다고 한다. 징글징글하다는 동생의 평에, 엄마처럼 쟁여놓는 스타일의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나의 이야기 2025.05.09

철이 넘치는 5월의 신부

철이 넘치는 5월의 신부이정아다시 5월이다. 어린이날, 어머니날, 스승의 날이 있고 우리집엔 남편생일과 결혼기념일도 있으니 가히 가정의 달이라 할 만하다. 며칠 후면 부부의 날이기도 하다. 둘이 만나 하나가된다는 뜻을 가진 '부부의 날'은 5월 21일이다. 미국에선 1981년에 생긴 세계 결혼기념일을 한국에선 부부의 날로 고쳐 200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오래전 5월 21일, 그 날은 음력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 공휴일이었고 남편의 생일이었으며 내 결혼식날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행인 데이지 부케를 든 나름우아한 5월의 신부였다. 그 며칠 전 광주항쟁이 발발하여, 여파로 서울시청앞 광장에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지근거리인 태평로의 신문회관이 예식 장소였는데, 신문사에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

나의 이야기 2025.05.08

불면의 밤들

[이 아침에]불면의 밤, 파면 그 후[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4.07 19:46이정아/수필가지난 몇 달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이젠 끝나나 보다 기대했는데 무산이 되어버렸다.미국국적의 내가 무에 그리 한국정치에 관심이 있었으랴만, 조국의 일이며 형제 친지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성질은 급한데 헌재의 결정은 부지하세월이라 불안하여 일손을 놓았다. 글이 써지질 않아 잡지사 기고문도 신문 칼럼도 순서가 뒤처졌다.독서도 멀리하고 드라마와 영화에도 눈이 안 갔다. 현실이 더 극적이고 피를 말리는데 이런 스토리를 어디에서 체험한 단말인가? 유튜브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으면서 열불 나는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선배님들과의 친목모임에 가서는 한국정치이야기를 하다 서로 얼굴을 붉혔..

나의 이야기 2025.04.08

눈먼 사랑을 구경한 죄

[이 아침에][눈먼 사랑을 구경한 죄][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3.10 19:03이정아/수필가간신히 얻어가진 밸런타인 장미꽃은 일주일이 넘어가자 시들었다. 거꾸로 매달아 말려볼까 하다가 말린꽃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듯한 궁색한 짓은, 내 나이엔 하는 게 아니다 싶어 초록색 쓰레기 통에 과감히 던졌다. 안개꽃과 유칼립투스는 아직 쓸만하건만. 신혼부부도 아니고 45년 동안이나 살면서 무슨 사랑운운 할게 남아있을까? ‘동지애’ 정도겠지. 50대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이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중계했다. 사랑과 연기와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지 않은가? 본인 말로는 사랑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부적절한 관계였다. 눈먼 사랑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았다. 이목이나 평판..

나의 이야기 2025.03.11

사랑주머니

사랑주머니이정아/수필가민속명절인 설날이 지나자, 사방이 하트로 도배되는 사랑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살던 시절엔 발렌타인 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 고백하는 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본, 중국, 한국의 동남아권 에서는 2월 발렌타인 데이에 진 빚을 갚으라고 3월 화이트데이가 생겼다고도 한다. 3월엔 남자가 여자에게 캔디를 준다나 뭐라나. 일본에서 들어온 풍속이라는데 아무래도 초콜릿 회사가 만든 상술인듯하다.그러다가 미국에 오니 한국과는 양상이 달랐다. 성 발렌티노 신부가 등장하는 전래된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꽃이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발렌타인 데이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 조부모, 선생님에게 하트를 그리거나 색종이로 오려 붙인 카드를 선물하고. 대개 남자가 아내나 ..

나의 이야기 2025.02.09

달팽이 뿔 위에서

[이아침에]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지말고[Los Angeles]입력 2025.02.04 17:52 수정 2025.02.04 18:52이정아/수필가“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이런 직설적인 덕담은 우리 어릴 땐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물질을 내놓고 말하면 품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말을 이 삼십 년 전에 했더라면, 주변사람들로부터 받았을 경멸의 시선을 요즈음 젊은이들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돈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도 보통은 그렇게 입에 올려가며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다. 돈이 인격이자 지위이자 그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큰 척도가 되는 요즈음, 그걸 보고 “천박해!” 하고 평가할 용기는 아마 없을 듯하다. 연말연시에 주고받은 인사대로 라면..

나의 이야기 2025.02.05

태양을 품은 뱀을 펼쳐보며

[이 아침에] 태양을 품은 뱀을 펼쳐보며[Los Angeles]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1.12 17:00 수정 2025.01.11 23:39이정아/수필가올해는 을사년 뱀의 해이다. ‘을(乙)’은 푸른색을 상징하므로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뱀은 12간지 동물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은 아니다. 오히려 무섭거나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실제로 우리집엔 안창홍 화백의 ‘태양을 품은 뱀’ 이라는 제목의 1989년도 판화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정집에 있던 그림을 동생들과 나눌 때 내 몫의 그림 속에 끼어 왔다. 미국에 가져와서는 으스스해서 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권과 문학 속에서 뱀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먼저 뱀은 겨울잠을 자고 봄에..

나의 이야기 2025.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