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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거래를 해보니

[이 아침에] 당근거래를 해보니[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5.08 20:32 이정아/수필가미국에서 구입한 첫 집에서 37년째 살고 있다. 요령이 없는 것인지 능력이 없는 것인지 집을 늘려가지도 바꾸지도 못하고 산 지 오래되었다. 아들아이가 결혼하고 독립하여서 더 넓은 집이 이젠 필요하지도 않다.세월만큼 살림살이도 쌓여, 버려야 할 허섭스레기도 산과 같다. 버리자니 정이 들어 버린다 버린다 하며 끼고 살았다. 친정 엄마 돌아가신 후의 심란했던 엄마의 짐정리가 생각이 났다. 크지 않은 아파트에 장롱마다 광마다 가득했던 물건들은 분류에 지쳐 동생이 비용을 써가며 새 물건조차 모두 버렸다고 한다. 징글징글하다는 동생의 평에, 엄마처럼 쟁여놓는 스타일의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나의 이야기 2025.05.09

철이 넘치는 5월의 신부

철이 넘치는 5월의 신부이정아다시 5월이다. 어린이날, 어머니날, 스승의 날이 있고 우리집엔 남편생일과 결혼기념일도 있으니 가히 가정의 달이라 할 만하다. 며칠 후면 부부의 날이기도 하다. 둘이 만나 하나가된다는 뜻을 가진 '부부의 날'은 5월 21일이다. 미국에선 1981년에 생긴 세계 결혼기념일을 한국에선 부부의 날로 고쳐 200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오래전 5월 21일, 그 날은 음력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 공휴일이었고 남편의 생일이었으며 내 결혼식날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행인 데이지 부케를 든 나름우아한 5월의 신부였다. 그 며칠 전 광주항쟁이 발발하여, 여파로 서울시청앞 광장에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지근거리인 태평로의 신문회관이 예식 장소였는데, 신문사에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

나의 이야기 2025.05.08

불면의 밤들

[이 아침에]불면의 밤, 파면 그 후[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4.07 19:46이정아/수필가지난 몇 달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이젠 끝나나 보다 기대했는데 무산이 되어버렸다.미국국적의 내가 무에 그리 한국정치에 관심이 있었으랴만, 조국의 일이며 형제 친지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성질은 급한데 헌재의 결정은 부지하세월이라 불안하여 일손을 놓았다. 글이 써지질 않아 잡지사 기고문도 신문 칼럼도 순서가 뒤처졌다.독서도 멀리하고 드라마와 영화에도 눈이 안 갔다. 현실이 더 극적이고 피를 말리는데 이런 스토리를 어디에서 체험한 단말인가? 유튜브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으면서 열불 나는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선배님들과의 친목모임에 가서는 한국정치이야기를 하다 서로 얼굴을 붉혔..

나의 이야기 2025.04.08

눈먼 사랑을 구경한 죄

[이 아침에][눈먼 사랑을 구경한 죄][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3.10 19:03이정아/수필가간신히 얻어가진 밸런타인 장미꽃은 일주일이 넘어가자 시들었다. 거꾸로 매달아 말려볼까 하다가 말린꽃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듯한 궁색한 짓은, 내 나이엔 하는 게 아니다 싶어 초록색 쓰레기 통에 과감히 던졌다. 안개꽃과 유칼립투스는 아직 쓸만하건만. 신혼부부도 아니고 45년 동안이나 살면서 무슨 사랑운운 할게 남아있을까? ‘동지애’ 정도겠지. 50대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이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중계했다. 사랑과 연기와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지 않은가? 본인 말로는 사랑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부적절한 관계였다. 눈먼 사랑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았다. 이목이나 평판..

나의 이야기 2025.03.11

사랑주머니

사랑주머니이정아/수필가민속명절인 설날이 지나자, 사방이 하트로 도배되는 사랑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살던 시절엔 발렌타인 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 고백하는 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본, 중국, 한국의 동남아권 에서는 2월 발렌타인 데이에 진 빚을 갚으라고 3월 화이트데이가 생겼다고도 한다. 3월엔 남자가 여자에게 캔디를 준다나 뭐라나. 일본에서 들어온 풍속이라는데 아무래도 초콜릿 회사가 만든 상술인듯하다.그러다가 미국에 오니 한국과는 양상이 달랐다. 성 발렌티노 신부가 등장하는 전래된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꽃이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발렌타인 데이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 조부모, 선생님에게 하트를 그리거나 색종이로 오려 붙인 카드를 선물하고. 대개 남자가 아내나 ..

나의 이야기 2025.02.09

달팽이 뿔 위에서

[이아침에]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지말고[Los Angeles]입력 2025.02.04 17:52 수정 2025.02.04 18:52이정아/수필가“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이런 직설적인 덕담은 우리 어릴 땐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물질을 내놓고 말하면 품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말을 이 삼십 년 전에 했더라면, 주변사람들로부터 받았을 경멸의 시선을 요즈음 젊은이들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돈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도 보통은 그렇게 입에 올려가며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다. 돈이 인격이자 지위이자 그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큰 척도가 되는 요즈음, 그걸 보고 “천박해!” 하고 평가할 용기는 아마 없을 듯하다. 연말연시에 주고받은 인사대로 라면..

나의 이야기 2025.02.05

태양을 품은 뱀을 펼쳐보며

[이 아침에] 태양을 품은 뱀을 펼쳐보며[Los Angeles]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1.12 17:00 수정 2025.01.11 23:39이정아/수필가올해는 을사년 뱀의 해이다. ‘을(乙)’은 푸른색을 상징하므로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뱀은 12간지 동물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은 아니다. 오히려 무섭거나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실제로 우리집엔 안창홍 화백의 ‘태양을 품은 뱀’ 이라는 제목의 1989년도 판화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정집에 있던 그림을 동생들과 나눌 때 내 몫의 그림 속에 끼어 왔다. 미국에 가져와서는 으스스해서 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권과 문학 속에서 뱀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먼저 뱀은 겨울잠을 자고 봄에..

나의 이야기 2025.01.13

How old are you?

[이 아침에] 너 몇 살이니?[Los Angeles] 중앙일보 입력 2024.12.23 18:05 수정 2024.12.23 19:05이정아/수필가며칠 전 소그룹의 연말 모임을 하려고 일식 뷔페에서 모였다. 특별히 수요일엔 10% 시니어 디스카운트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수요일로 잡았다. 그래봐야 2불 남짓 절약이지만, 연금 받는 은퇴자의 사는 방법으로 합당하다 생각했다. 나와 띠동갑 위인 8 순 넘으신 멋쟁이 선배님이 조금 늦게 오셨다. 입구에서 계산하지 않고 직진해서 우리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도우미 청년이 선배님의 밥값계산서를 가져왔다. 일반 어른요금이 찍혔기에 시니어 할인으로 계산해 달라고 요청했다.젊은 도우미가 선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대뜸 “How old ar..

나의 이야기 2024.12.24

북치는 할배

북치는 할배​이정아/수필가​아이가 어릴 때 학예회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인‘little drummer boy' 를 불렀다. 그때 소품으로 합창하는 아이들의 드럼을 준비해야 했는데, 엄마들의 아이디어로 캔터키 치킨의 패밀리팩을 사서 그 통을 북 대신 쓴 적이 있다. 치킨 통을 목에 걸고 젓가락으로 북치는 시늉을 하며 "파~람 팜팜 파~" "파~람 팜팜 파~" 노래하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 후로 25년이 흘러 우리집에 북치는 어른이 나타났다. 리틀 드러머가 자라서 어른 드러머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그 아이의 아비인 내 남편이 북을 치니 엄밀히 말하면 '북치는 할배‘인 거다. 교회 성가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남편이 팀파니를 연주하라는 명을 받았다. ​순종을 잘 하는 남편은 지휘자 목사님의 말씀대로 새해부터..

나의 이야기 2024.12.14

도둑이 들다

[이 아침에] 밤새 안녕하신지?중앙일보 Los Angeles입력 2024.11.25 17:59 수정 2024.11.25 19:00타이페이에 놀러 간 아들아이가 카톡을 했다. 우리 사업장인 야구 연습장에 도둑이 들었다며. 알람회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건물 책임자가 아들아이로 되어있어서 여행 중인 아들에게 연락이 간 모양이다.우린 예배 중이어서 교회 마치고 야구연습장으로 향했다. 알람회사의 연락을 받은 경찰은 이미 다녀갔고, 신고서 양식을 두고 갔다. 피해 리스트와 피해액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출하라고 한다.가게문을 연 직원이 사무실에 들어오니 난리도 아니더라며 동영상을 찍어 두었다. 연습장 쪽 사무실은 금전등록기를 부수고 동전을 여기저기 흩어놓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건축회사 쪽 사무실도 온갖 서랍은 ..

나의 이야기 202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