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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사랑을 구경한 죄

[이 아침에][눈먼 사랑을 구경한 죄][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3.10 19:03이정아/수필가간신히 얻어가진 밸런타인 장미꽃은 일주일이 넘어가자 시들었다. 거꾸로 매달아 말려볼까 하다가 말린꽃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듯한 궁색한 짓은, 내 나이엔 하는 게 아니다 싶어 초록색 쓰레기 통에 과감히 던졌다. 안개꽃과 유칼립투스는 아직 쓸만하건만. 신혼부부도 아니고 45년 동안이나 살면서 무슨 사랑운운 할게 남아있을까? ‘동지애’ 정도겠지. 50대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이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중계했다. 사랑과 연기와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지 않은가? 본인 말로는 사랑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부적절한 관계였다. 눈먼 사랑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았다. 이목이나 평판..

나의 이야기 2025.03.11

사랑주머니

사랑주머니이정아/수필가민속명절인 설날이 지나자, 사방이 하트로 도배되는 사랑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살던 시절엔 발렌타인 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 고백하는 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본, 중국, 한국의 동남아권 에서는 2월 발렌타인 데이에 진 빚을 갚으라고 3월 화이트데이가 생겼다고도 한다. 3월엔 남자가 여자에게 캔디를 준다나 뭐라나. 일본에서 들어온 풍속이라는데 아무래도 초콜릿 회사가 만든 상술인듯하다.그러다가 미국에 오니 한국과는 양상이 달랐다. 성 발렌티노 신부가 등장하는 전래된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꽃이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발렌타인 데이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 조부모, 선생님에게 하트를 그리거나 색종이로 오려 붙인 카드를 선물하고. 대개 남자가 아내나 ..

나의 이야기 2025.02.09

달팽이 뿔 위에서

[이아침에]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지말고[Los Angeles]입력 2025.02.04 17:52 수정 2025.02.04 18:52이정아/수필가“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이런 직설적인 덕담은 우리 어릴 땐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물질을 내놓고 말하면 품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말을 이 삼십 년 전에 했더라면, 주변사람들로부터 받았을 경멸의 시선을 요즈음 젊은이들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돈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도 보통은 그렇게 입에 올려가며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다. 돈이 인격이자 지위이자 그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큰 척도가 되는 요즈음, 그걸 보고 “천박해!” 하고 평가할 용기는 아마 없을 듯하다. 연말연시에 주고받은 인사대로 라면..

나의 이야기 2025.02.05

태양을 품은 뱀을 펼쳐보며

[이 아침에] 태양을 품은 뱀을 펼쳐보며[Los Angeles]미주 중앙일보입력 2025.01.12 17:00 수정 2025.01.11 23:39이정아/수필가올해는 을사년 뱀의 해이다. ‘을(乙)’은 푸른색을 상징하므로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뱀은 12간지 동물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은 아니다. 오히려 무섭거나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실제로 우리집엔 안창홍 화백의 ‘태양을 품은 뱀’ 이라는 제목의 1989년도 판화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정집에 있던 그림을 동생들과 나눌 때 내 몫의 그림 속에 끼어 왔다. 미국에 가져와서는 으스스해서 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권과 문학 속에서 뱀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먼저 뱀은 겨울잠을 자고 봄에..

나의 이야기 2025.01.13

How old are you?

[이 아침에] 너 몇 살이니?[Los Angeles] 중앙일보 입력 2024.12.23 18:05 수정 2024.12.23 19:05이정아/수필가며칠 전 소그룹의 연말 모임을 하려고 일식 뷔페에서 모였다. 특별히 수요일엔 10% 시니어 디스카운트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수요일로 잡았다. 그래봐야 2불 남짓 절약이지만, 연금 받는 은퇴자의 사는 방법으로 합당하다 생각했다. 나와 띠동갑 위인 8 순 넘으신 멋쟁이 선배님이 조금 늦게 오셨다. 입구에서 계산하지 않고 직진해서 우리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도우미 청년이 선배님의 밥값계산서를 가져왔다. 일반 어른요금이 찍혔기에 시니어 할인으로 계산해 달라고 요청했다.젊은 도우미가 선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대뜸 “How old ar..

나의 이야기 2024.12.24

북치는 할배

북치는 할배​이정아/수필가​아이가 어릴 때 학예회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인‘little drummer boy' 를 불렀다. 그때 소품으로 합창하는 아이들의 드럼을 준비해야 했는데, 엄마들의 아이디어로 캔터키 치킨의 패밀리팩을 사서 그 통을 북 대신 쓴 적이 있다. 치킨 통을 목에 걸고 젓가락으로 북치는 시늉을 하며 "파~람 팜팜 파~" "파~람 팜팜 파~" 노래하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 후로 25년이 흘러 우리집에 북치는 어른이 나타났다. 리틀 드러머가 자라서 어른 드러머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그 아이의 아비인 내 남편이 북을 치니 엄밀히 말하면 '북치는 할배‘인 거다. 교회 성가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남편이 팀파니를 연주하라는 명을 받았다. ​순종을 잘 하는 남편은 지휘자 목사님의 말씀대로 새해부터..

나의 이야기 2024.12.14

도둑이 들다

[이 아침에] 밤새 안녕하신지?중앙일보 Los Angeles입력 2024.11.25 17:59 수정 2024.11.25 19:00타이페이에 놀러 간 아들아이가 카톡을 했다. 우리 사업장인 야구 연습장에 도둑이 들었다며. 알람회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건물 책임자가 아들아이로 되어있어서 여행 중인 아들에게 연락이 간 모양이다.우린 예배 중이어서 교회 마치고 야구연습장으로 향했다. 알람회사의 연락을 받은 경찰은 이미 다녀갔고, 신고서 양식을 두고 갔다. 피해 리스트와 피해액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출하라고 한다.가게문을 연 직원이 사무실에 들어오니 난리도 아니더라며 동영상을 찍어 두었다. 연습장 쪽 사무실은 금전등록기를 부수고 동전을 여기저기 흩어놓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건축회사 쪽 사무실도 온갖 서랍은 ..

나의 이야기 2024.11.26

밀당이 필요했던 여행

[이 아침에] [밀당이 필요했던 여행] [Los Angeles]중앙일보 미주판 입력 2024.10.27 16:52 이정아/수필가 운동을 싫어하는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가도 호텔방에서 뒹굴며 책만 읽다 오곤 한다. 몸을 움직이는 건 다 노동이라 생각해서 남들이 여행을 간다고 하면 "고생문이 훤하다"라고 김을 빼는 편이었다. 다리 관절수술을 한 데다 평발이어서 오래 걷질 못하는 불편함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공항에선 휠체어 서비스를 받고, 크루즈 배에선 스쿠터를 빌려 탈 수 있어서 그나마 수월했다. 항구에 정박한 후 선택 관광을 할 땐 보행거리가 짧은 가장 낮은 단계의 옵션을 택해야 한다. 이번 여행은 '무엇을 보지 않을까'를 결정해야 하는 희한한 여행이었다. 나..

나의 이야기 2024.10.28

가을이 오면

[이 아침에] [Los Angeles]중앙일보 미주판 입력 2024.09.05 18:28 가을이 오면 9월이 되었습니다. 입추가 지났고 추석이 다가 옵니다. 본격 가을이 시작되겠죠. 큰 명절을 앞둔 이맘때면 한국에 있는 그리움의 존재들을 생각합니다. 부모님 모두 작고하시고 한국엔 남동생 셋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뿐인 누이는 멀리 미국에 이렇게 떨어져 산 지 오래입니다. 해마다 추석즈음엔 한국에 나가거나, 못 가면 추석을 쇠시라고 어머니께 약간의 송금을 하곤 했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세 동생들은 부모님을 합장한 묘소에서 추도예배를 드리고, 오는 길에 식당을 정해 함께 식사하더군요. 요즘 세태에 맞는 방법인 듯합니다. 저는 세 동생 집에 엘에이 갈비를 보내는 것으로 추석선물을 대신합니다. 마침 제가 엘에이 ..

나의 이야기 2024.09.06

방심

방심(放心) 이정아 팬데믹동안 조심조심 살았다. 사람 모이는 곳엔 안 가고 심지어 교회에 가서도 환자실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고 나름 신경을 썼다. 나처럼 장기 이식을 한 환자들은 일반인들에게 특효인 코로나 치료제 Paxlovid 도 쓰질 못해서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치의가 늘 강조한 발병 이전의 예방수칙을 준수했다. 주치의는 텃밭 가꾸기도 흙에 균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팬데믹이 해제되자 연주회다 강연회다 전시회다 다들 몰려가도 몸을 사리고, 2-3년 발길을 끊다 보니 그게 인생의 큰 몫을 차지하는 게 아닌 듯 생각이 들어 아쉽지 않고 덤덤해졌다. 팬데믹이 가져다준 선물인 ‘혼자 놀기’에 익숙해졌다. 아이패드 하나만 있으면 유튜브로 음악회도 전시회도 영화도 책 읽기도 다 가능한 ..

나의 이야기 202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