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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 역전/ 이정아

[이 아침에] 염색 역전(逆轉)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2.12.22 19:08 수정 2022.12.22 20:08 이곳에서는 진작부터 만 나이를 썼기에, 12월의 내 생일이 지나자 한 살을 먹고 내년 5월 남편의 생일까지는 연상녀로 살게 된다. 같은 학번이나 남편이 5개월 늦다. 그 때 까지 누님답게 가르치며 너그러이 봐주면서 살아보겠다. 젊어 보이는 어떠한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하는 나는( 실은 무섭다. 주사도 성형도 ), '생긴 대로 살자' 주의이다. 나이 들면 주름은 당연한 것이며, 나이만큼 늙어 보여야 인간적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큰 병으로 병원신세를 오래 지고 나서는 모두들 내 나이보다 더 보는 경향이 있다. 미간에 병고의 흔적인 세로 두 줄의 주름이 결정적으로..

나의 이야기 2022.12.24

이게 다는 아니겠죠?

[이 아침에]이게 다는 아니겠죠? Los Angeles 중앙일보 입력 2022.12.11 18:09 수정 2022.12.11 19:09 이정아/수필가 조카가 딸을 낳았다. 조카사위는 눈이 크고 키도 크고 인물이 좋다. 훈남 아이돌 같다. 조카는 그 반대로 키도 눈도 작은 얌전이. 아기는 누가 봐도 모계로 보인다. 아빠 닮아 눈이 크면 좋으련만 하고 속으로 살짝 아쉬웠지만 말하지 않았다. 할 말 없으니 “귀엽네” 하며 축하 인사했다. 심지어 내 남편은 “장군 같네”라고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딸이다. 우리 집의 4남매는 모두 눈이 크다. 우리 형제들은 친가와 외가가 왕눈이어서 큰 눈엔 별 매력을 못 느꼈는지 배우자는 모두 작은 눈의 홑꺼풀을 골랐다. 세 며느리와 한 사위가 모두 쌍꺼풀이 없다. 무쌍의 가늘..

나의 이야기 2022.12.12

노인대학 조기 입학생/이정아

[이 아침에] 노인대학 조기 입학생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2.11.29 18:53 수정 2022.11.29 19:53 이정아/수필가 한국에 여고 졸업 6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오신 선배님이 한숨을 푹 쉬며 말씀하신다. “팬데믹 전만 해도 단체로 옷 맞춰 입고 라인댄스에 연극도 했었는데 양상이 달라졌어. 그 사이 하늘나라 간 친구들이 여럿, 휠체어 탄 친구가 셋, 지팡이를 짚은 친구가 둘이더라고.” 하며 우울해하신다. 나보다 13년 선배시니 팔순에 가까운 선배님들이긴 하다. 몇 년 전 3박 4일로 남해 리조트 빌려 놀던 프로그램은 없어지고, 점심시간에 만나 밥만 먹고 조용히 헤어지는 것으로 바뀌어 큰돈 들여 한국 나간 것이 아깝더라 하신다. 100세 시대니 뭐니 해서 영원히 살 것 같아도 끝은 있기 마련..

나의 이야기 2022.11.30

칠면조 Turkey

칠면조, 터키 Turkey 이정아 이곳 사람들의 추수감사절용 절기음식으로 등장하는 것이 칠면조 요리이다. 올해만 해도 감사절에 4,500만 마리의 터키가 소비되었으며 성탄절엔 약 2,000만 마리의 터키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니 엄청 터키를 먹어 치우는가 보다. 기름기 없는 건강식이라 알려져서 터키 샌드위치 등이 인기 있기는 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1일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칠면조 두 마리를 사면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초콜릿’과 ‘칩’이라는 이름을 가진 칠면조 두 마리를 사면하면서 이 칠면조들이 노스캐롤라이나대에 방목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해마다 감사절에 있는 연례행사이다. 미국인들이 터키를 좋아한다는 것이 터키 쪽에서 볼 땐 사생결단의 일이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류임에도 머리..

나의 이야기 2022.11.27

물방울 무늬와 나

물방울 무늬 옷 이정아 3남 1녀의 고명딸인 나는 어머니가 각별히 생각하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늘 끼고 다니시던 책보에 들어있는 일본 주간지 ‘주간여성'을 열심히 보셨다. 우리나라에 주간지가 나오기 전이니 알록달록 선명한 화보가 인상적인 책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어머니는 일본 글을 아시니 열심히 보셨는데 내용은 주로 연예인들의 가십이었을 터이다. 가끔 어머니가 '기시 게이꼬(kishi keiko)'라는 일본 여배우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우아하고 옷도 잘 입고 이러시더니 어느 날 동네 양장점으로 날 데려가셔서 내게 옷을 한 벌 맞춰주셨다. 흰 바탕에 빨강 물방울무늬의 천으로 만든 원피스인데 앞의 가슴께는 단색 빨강으로 덧댄 알프스 소녀 같은 스타일이었다. 무덤덤 한 남편이 그 옷을 ..

나의 이야기 2022.10.03

허세와 분수/이정아

허세와 분수 오래전 우리가 미국에 와서 구입한 첫 차는 1976년도형 올스모빌 델타88 이었다. 85년에 샀으니 이미 남이 10년 동안 타고 다닌 중고차를 산 것이다. 8기통의 기름을 하마처럼 먹는 탱크 같은 차였다. 크기도 크고 소리도 요란한 하늘색의 긴 세단을 그 당시 700불을 주고 샀다. 미국이 오일쇼크일 때여서 기름을 많이 먹는 차는 환영을 받지 못할 때였다. 그때의 유학생들의 차가 다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별로 창피하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자 남편은 모터 싸이클을 마련해 그걸 타고 학교를 다녔으므로, 나와 아이의 전용차 격인 그 차로 Austin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운전 초기,큰 차의 운전이 서툴었던 나는 다니던 미국 교회의 주차장에서 아주 작고 허름한 차를 박았는데 주인이 없기에 메모를 적..

나의 이야기 2022.09.13

술익는 집/이정아

술 익는 집 뒷마당에 대추를 따러나간 남편이 한 소쿠리의 대추 위에 감나무 한 가지를 잘라 얹어 가지고 들어 왔다. 주홍빛 감이 아니어서 익지도 않은 감을 왜 따왔냐 했더니, 선홍색이 아니라도 달기에 단감이라고 한다나?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남편에게도 깎아 진상하지 않는다. 남편이 자기가 먹느라 깎으면 한 조각 옆에서 얻어먹을 뿐이다. 남편은 모든 과일을 한번 씻어 껍질째 먹건만, 자기가 농사지은 감에 내가 별 관심을 갖지 않자 잘 깎아서 가지런히 늘어놓고 먹어보라고 한다. 생각보다 맛이 들어 달콤했다. 사과, 배, 귤, 레몬, 오렌지, 살구, 복숭아, 넥타린, 자두, 무화과, 대추, 과바, 아보카도, 파파야, 감, 포도, 모과, 앵두, 그레이프 프룻, 낑깡, 드래건 프룻, 파인애플, 오디, ..

나의 이야기 2022.09.06

Right of way

Right of way 이정아 언덕길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길이 가파르고 좁다. 양쪽 길옆에 차를 세우고 나면 가운데로 차가 한 대 지나갈 수 있다. 두 대가 한 번에 지나치기엔 빠듯하다. 차고가 있어도 대개 집 밖에 차들을 세우므로 길이 여유롭지 않다. 어떤 이들은 너무 높은 지역이어서 어지럽다고 하나 미국인들은 view(전망)가 좋다고 선호하는 지역이다. 집 창문으로 Hollywood라는 빅 싸인이 보이는 것을 이 동네 사람들은 자랑거리로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 구역예배라도 모일라치면 교인들은 미리 차를 정비해야 그 동네의 언덕길을 올라갈 수 있다는 둥, 또는 바퀴 밑에 고일 벽돌을 준비하라는 둥의 조크를 한다. 한적한 동네여서 그런 일은 많지 않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차와 내려가는 차가 길 한복판..

나의 이야기 2022.08.19

복권, 갬블,골드러시

그 신기루 이정아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골든 스테이트'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필시 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눈치챘으리라. 1848년 어느 날, 빚을 지고 야반도주한 스위스 사람 존 서터는 캘리포니아의 광산촌에 정착을 하였다. 어느 날 그의 광산에서 난데없는 소동이 벌어졌다. 현장감독이 들고 온, 아직 튀기지 않은 팝콘 크기의 두 조각의 금을 도화선으로 노다지 캐기의 소문은 열병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농촌에서, 대도시에서, 상인도 교사도 신문 편집인도 모두 본업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건강도 재산도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주야로 금 광맥을 찾기에만 혈안이 되었다. 당시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정부지로 높아갔던 물가는 이 노다지 캐기 현장의 탐욕과 살벌..

나의 이야기 2022.08.03

온 몸으로 쓰는 글

온몸으로 쓰는 글 이정아 2018년 이곳에서 개최된 해변 문학제에 강사로 오신 복효근 시인을 처음 뵈었다. 안성수 수필가와 함께 세미나 차 오셨는데, 만나기 전 시인님에 대해 미리 공부를 했다.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지은 분이란 걸 알았다.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몰래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

나의 이야기 2022.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