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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t and Pepper’

[이 아침에] ‘Salt and Pepper’ [Los Angeles] 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1.10.12 19:03 이정아/수필가 병원 진료실앞 복도에서 내가 앉은 휠체어를 남편이 밀고 있었다. 큰 수술을 마친뒤여서 내 몰골이 말이 아닐 때였다. 용모에 신경 쓸 새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고생으로 찌든 머리칼은 백발이었다. 그 때 옆에서 우리내외를 보고있던 분이 나더러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런다. 뜨헉! 누나라고 해도 봐드릴까 말까인데 남편과 나를 모자지간으로 보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실상을 파악한 그분은 미안한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병원에서 오던길로 미용실에 들러 당장 흑발로 염색을 하고,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래야 내 억울함이 풀릴것 같았다. 몇년동안 ..

나의 이야기 2021.10.14

기타 등등의 삶/이정아

[이 아침에] ‘기타 등등’의 삶 이정아 / 수필가 | [LA중앙일보] 2021/09/10 미주판 22면 | 입력 2021/09/09 19:00 페이스북에 20대의 사진을 올리는 게 요즘 유행이라기에 쓸만한 사진을 찾아보았다. 우리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추억에 잠겨 옛날을 반추하는 걸 좋아하는지, 여기저기 한창때의 사진으로 젊었던 한 시절을 과시하기 바쁘다. 작정한 이민이 아니라 유학생 남편 따라와 눌러앉은 이민이라 젊을 적 사진이 수중에 없다. 한국의 친정집 다락 어딘가에 있을 듯하다. 대학 졸업 앨범 사진을 올렸더니 “총기 있네” “똑똑해 보이네” 칭찬이 무성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똑똑하지 않았다. 치열한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들어가서 받은 첫 성적표엔 형편없는 석차가 적혀있었다. 전교 1등을 ..

나의 이야기 2021.09.10

두 가지 뇌물/이정아

[이 아침에] 내가 받은 두 가지 뇌물 ​ 이정아 / 수필가 | [LA중앙일보] 2021/08/11 미주판 20면ㅣ입력 2021/08/10 19:00 단골 반찬가게가 사업을 확장하여 식재료를 파는 마켓을 인수했다. 홈페이지를 업그레이드한다며 이미 고객인 사람도 다시 가입해 달라고 한다. 약간 귀찮아도 새 멤버로 가입을 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사업이 잘 된다는 말이니, 남의 일이어도 얼마나 좋은가? ​오늘, 주문한 식품이 배달되었는데 봉투 안에 시키지도 않은 것이 들어있다. ‘뇌물‘이라고 당당하게 스티커까지 붙은 이것은 오돌오돌하게 무친 맛있는 오이지이다. “이거 받으면 우리 단골 되는 거다”하는 문구가 은근한 협박조다. 홈페이지로 인한 미안함을 귀여운 뇌물로 입막음 하려는게 아닌가? 뇌물이라는 부정적..

나의 이야기 2021.08.11

선한 부메랑/이정아

선한 부메랑 [이 아침에] 이정아 / 수필가 | [LA중앙일보] 2021/07/12 미주판 20면 | 입력 2021/07/11 19:00 아침 일찍 들러 오이와 가지, 호박을 따간 S 시인이 저녁 무렵 식혜 2병과 무짠지를 현관 앞에 두고 갔다. 식혜는 주겠거든 한 병만 달라고 노래를 해도, 인심 후한 시인은 아들네도 주라며 내 말은 듣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식혜 맛을 모르는지 아들 집 냉장고 구석에서 구박받는 식혜를 보곤 아들 한테는 보내지 않기로 했다. 교회에 가져가서 구역 식구들과 친교시간에 먹으면 딱인데, 요즘의 교회 형편과 맞지를 않아 선배님께 SOS를 쳤다. 식혜 한 병을 픽업하러 오신 선배는 망고 한 상자와 맛난 붕어빵을 사 오셨다. 텃밭채소가 식혜가 되었다가 식혜는 망고로 3단 변신을 했다..

나의 이야기 2021.07.12

마음의 닻이 되는 작은 행복들

마음의 닻이 되는 작은 행복들 [이 아침에] 이정아 / 수필가 | [LA중앙일보] 2021/06/11 미주판 22면 | 입력 2021/06/10 20:00 “아가들아 잘 있었니?” 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이 안부인사를 한다. 남편을 알아본 것들이 벌써 난리법석이다. 첨벙하고 튀어 오르고 기척을 향해 몰려든다. 금붕어가 꼬리를 심하게 흔들고 이끼 먹는 못난이 메기 두 마리도 벽을 타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미꾸라지들도 주인을 알아보고 세리머니를 하는 듯하다. 물고기도 생각 없이 사는 게 아닌 모양이다. 여행가방을 안에 들이지도 않고, 현관 앞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며 남편은 먹이를 다 먹도록 기다린다. 붕어 밥 먹는 소리가 사람 못지않게 시끄럽다. 유난히 식사시간에 쩝쩝거리는 소리에 민감한 남편이다. 그런데 물고..

나의 이야기 2021.06.12

“현금과 나팔로 노래하라”

현금과 나팔로 노래하라 이정아 교회 성가대로 봉사할 때였다. 옆자리의 연세 많으신 권사님은 눈이 어두우셔서 내게 종종 가사를 묻곤 하셨다. 보통 “수금과 나팔로 찬양하라” 로 익숙한 노래였는데 그날의 악보에는 “현금과 나팔로 찬양하라”로 나와있었다. 외국 성가를 번역하다 보니 생긴 차이라 할 수 있다. 수금이나 현금이나 매일반으로 ‘손으로 연주하는 현악기’ 일 터. 요즘의 미니 하프나 크로마하프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거 현금이 뭐이니? 현찰 이가?” 하시는 거다. 이북 사투리로 물으시는데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해서 장난기가 발동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한술 더 떠서 “교회 악보에 캐시(cash)를 다 쓰고 말세다 말세” 이러셔서 그 놀라운 응용력에 폭소를 했다. 그날의 성..

나의 이야기 2021.05.24

줄리의 법칙

[이 아침에]줄리의 법칙 [LA중앙일보] 2021/04/14 미주판 20면 입력 2021/04/13 19:00 이정아/수필가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데 그 일이 원하지 않는 불운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경우,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게 된다. 팬데믹 기간 중 교통사고가 났다.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스톱 사인에 서지 않고 질주를 하여 그대로 남편이 운전하던 차를 받았다. 차는 큰 손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간 청년은 안타깝게도 며칠 뒤 사망을 했다. 경찰에 의하면 사고 난 오토바이는 청년이 훔친 거였고, 그 청년은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절도죄를 짓고 사고를 냈다는 거였다. 유명을 달리한 청년에게 가졌던 죄책감이나 동정심도 반감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필이면 사망사고, 하필이면 훔친 차, 하필..

나의 이야기 2021.04.14

쑥 캐러 간 날

[이 아침에] 쑥 캐러 간 날 [LA중앙일보] 2021/03/16 미주판 18면 입력 2021/03/15 19:00 이정아/수필가 치노힐스의 너른 집에 사는 페이스북 친구가 마당에 지천으로 핀 쑥 사진을 올리셨다. 그 쑥으로 끓인 쑥국과 쑥부침개 사진은 침샘을 자극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 일뿐이지만 코끝에 쑥 향기가 며칠째 감돌았다. 쑥을 구하려 웹사이트를 뒤져보고 모종 가게와 마켓에 나왔나 알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한뿌리만 주시겠습니까?” 남에게 아쉬운 소리 죽어도 하기 싫어하는 내가 용기를 내어 쑥 사진 밑에 댓글을 달았다. 한뿌리만 심으면 다음 해엔 마구 퍼진다기에 소망을 담은 ‘한뿌리 적선’을 구한 거였다. 맘씨 좋은 그분은 기꺼이 주시마 했다. 자신과 친한 내 선배가 그 댁에 놀러 올 ..

나의 이야기 2021.03.17

사랑주머니

[이 아침에] 우리 마음속의 ‘사랑주머니’ [LA중앙일보] 2021/02/17 미주판 17면 입력 2021/02/16 19:00 이정아/수필가 사방이 하트로 도배를 하는 사랑의 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한국에 살던 시절엔 밸런타인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 고백하는 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본, 중국, 한국의 동남아권 에서는 2월 밸런타인데이에 진 빚을 갚으라고 3월 화이트데이가 생겼다고도 한다. 3월엔 남자가 여자에게 캔디를 준다나 뭐라나. 일본에서 들어온 풍속이라는데 아무래도 초콜릿 회사가 만든 상술인듯하다. 그러다가 미국에 오니 한국과는 양상이 달랐다. 성 발렌티노 신부가 등장하는 전래된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꽃이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밸런타인데이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 ..

나의 이야기 2021.02.17

비대면 시대의 쇼핑/이정아

[이 아침에] 비대면 시대의 쇼핑 [LA중앙일보] 2021/01/15 미주판 18면 입력 2021/01/14 20:00 이정아/수필가 비대면 시대가 되니 사람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눈에서 멀면 마음도 멀어지듯 연말연시에 여기저기 챙기던 선물은 준비하지 않아도 덜 미안한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평소 늘 사랑해 주시던 선생님과 날 챙기던 제자한테는 무어라도 보내고 싶었다. 선생님은 연세가 드셔서 부엌일이 힘드시다니 반 조리된 음식을 주문해 보냈고, 샌프란시스코의 제자한테는 크리스마스 꽃을 주문해 보내고 할 일 다 한 듯 흡족했다. 주문처로 부터 명절 전 배달을 확약받은 터라, 안심하고 기다리며 설렜다. 선물 받고 반가워할 모습들을 미리 그려보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웬걸. 선물의 절기를 맞아 배달 물량이..

나의 이야기 202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