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쑥 캐러 간 날

Joanne 1 2021. 3. 17. 17:29

[이 아침에] 쑥 캐러 간 날
[LA중앙일보] 2021/03/16 미주판 18면
입력 2021/03/15 19:00

이정아/수필가

치노힐스의 너른 집에 사는 페이스북 친구가 마당에 지천으로 핀 쑥 사진을 올리셨다. 그 쑥으로 끓인 쑥국과 쑥부침개 사진은 침샘을 자극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 일뿐이지만 코끝에 쑥 향기가 며칠째 감돌았다.

쑥을 구하려 웹사이트를 뒤져보고 모종 가게와 마켓에 나왔나 알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한뿌리만 주시겠습니까?” 남에게 아쉬운 소리 죽어도 하기 싫어하는 내가 용기를 내어 쑥 사진 밑에 댓글을 달았다.

한뿌리만 심으면 다음 해엔 마구 퍼진다기에 소망을 담은 ‘한뿌리 적선’을 구한 거였다. 맘씨 좋은 그분은 기꺼이 주시마 했다. 자신과 친한 내 선배가 그 댁에 놀러 올 때 그 편에 보내겠다고 하셨다.

내 책 한 권을 사인해서 선배께 맡겼다. 쑥 받아올 때 감사의 표시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선배가 그 댁에 초대받아 간다며 “함께 갈래?” 묻는다. 동반해도 좋다고 쑥밭 주인이 허락했다는 거다. “가고 싶어요” 팬데믹 기간에 병원 외출만 하도록 제한을 둔 남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가겠다고 했다.

드디어 쑥과 만났다. 원 에이커 넘는 땅에 쑥밭은 한 귀퉁이에 불과했어도 시퍼런 쑥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집안에는 성대한 파티 상차림이 이미 준비되어있고, 그 댁의 부군이 생신이라고 한다. 쑥 얻을 생각에 따라갔다가 호사를 누렸다. 쑥 집 내외분이 오래전부터 신문에서 내 글을 읽고 팬이 되었다며 반가워해주셔서 도리어 송구했다.

향긋한 쑥부침개를 실물로 영접하고 쑥국 대신 생신 미역국을 먹었다. 갖은 나물에 여러 종류의 김치. 산해진미의 점심을 먹고 저녁으로 스테이크까지 두 끼의 상을 받았다. 코로나 기간 중 유튜브를 보시며 요리가 취미가 되신 바깥 선생님의 명태 석박지와 가자미식해도 일품이었다. 팬데믹의 첫 외출을 한 것인데 그동안의 감옥살이를 하루에 다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집주인과 방문객이 백신 접종을 완료한 터라 안심하고 마스크 없이 대화한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입술 근육이 풀린 날. 넉넉한 인심과 인품에 감동하고 웃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간 수집하신 그림으로 갤러리처럼 작품이 많아 그걸 구경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민 44년 차 올드타이머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술과 골프에 얽힌 기구 절창 한 이야기에 배꼽 빠질 뻔했다. 청일점이던 남편분이 쑥스러워하시다가 나중엔 이야기보따리로 손님 접대의 정점을 찍으셨다.

쑥은 잊어버리고 놀다 보니 어느새 어두워져 주인장이 한 삽 떠준 쑥 무더기를 안고 돌아왔다. 한 뿌리의 쑥이 열두 뿌리나 되었다.

마스크 벗은 자유를 만끽한 봄나들이. 쑥처럼 향기로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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