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딴 주머니의 유혹을 버리다/이정아

Joanne 1 2017. 3. 30. 22:38



[이 아침에] 딴 주머니의 유혹을 버리다


 이정아 / 수필가

[LA중앙일보] 03.29.17 17:37

가게에서 일하는 이가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어 몇 주간동안 내가 대신 야구 연습장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의 담당시간인 화·수·목 3일간 하루 6시간 파트타임 임시직인 셈이다.

옆에서 보던 일이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흔쾌히 하기로했다. 돈을 내면 그 값에 맞는 기계용 토큰으로 바꾸어 주면 되고, 자신의 전용 배트를 가져오지 않았으면 아이디를 받고 원하는 사이즈의 야구방망이를 빌려주면 된다.

아파서 일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 되어 그런지 순발력이 떨어져서 첫 날은 실수로 손해보는 장사를 두어시간 했다. 20달러어치 토큰을 달라는데 두배의 코인을 주고, 10달러 낸 이에겐 20달러 만큼 토큰을 주어 수십 달러 손해 본 후 아차했다. 머리를 안 쓰고 살았더니 그 나마의 지능도 떨어졌나보다. 두배수의 곱셈을 못하고 버벅대다니, 치매가 시작되려나 잠시 우울했다.

마침 봄방학 기간에다 야구시즌이 시작되어 몹시 바쁘다. 사무실에서 일 할 땐 숫자만 들여다봤는데, 돈을 직접 만지니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돈을 또 세고 또 센다. 돈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속물이 된다. 현찰의 매력(?)에 빠지는 재미에 장사를 하나보다. 예전엔 하루를 마감 할 때 매상에서 조금씩 떼어 비자금을 만든 적이 있었다. 벨벳으로 만든 양주주머니에 알토란 같은 내 돈이 수월찮게 있었다. 그 때의 밥 안먹어도 배불렀던 뿌듯한 기억을 잠시 추억했다. 아픈 뒤 딴 주머니는 물 건너간지 오래다.

전부터 오던 고객을 오랜만에 만나니 리틀리그 선수가 이젠 청년이 다 되어 아빠보다 커 있다. 세월이 빨리 지남을 실감했다. 아이디를 되돌려 줄 때 남자들은 대부분 'Ugly one!'을 달라며 겸손하다. 여성들은 예외 없이 여러 아이디 중 'most pretty lady!' 'Prettiest one'을 달라고 한다.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의 다른 어법은 여전하다. 30년 전에 와서 연습했던 꼬마는 결혼해서 아이손을 잡고 드나드는 곳. 오랜만에 오니 활기롭고 건전한 사업장인 것이 참 감사하다. 거리를 두었다 보니 예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란 시구처럼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후에 새로운 눈이 떠진 듯하다.

돈 버는 목적만 가지고 보던 예전엔 귀찮기도 했던 사업장이 이젠 감사하고 소중하니 말이다. 이번엔 주인 입장에서 좀 더 나은 서비스하느라 공짜 물과 음료수를 많이 쏘았다. 원칙 없이 그러면 나중에 직원들이 일하기 나쁘다며 좋은 일하고 남편에게 지청구 들었다. 그래도 건강이 나아져서 일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여전히 오는 단골 손님들도 감사하고, 좋은 날씨가 계속되니 야외연습장인 일터가 바빠서 또 감사하다.

직원들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을 청소하고 주의사항 포스터도 정비하고, 두고간 옷이며 소지품을 'lost and found'에 정리해 놓았다. 쓰레기통을 뒤지러온 갈매기가 끼룩대는 봄날의 오후. 문을 열어 놓으니 바람도 부드럽다.

딴 주머니의 욕심을 움켜쥐고 있었더라면 쓸데없는 낭비로 허송세월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몰랐을 소소한 삶의 행복을 이제 느낀다. 아프길 잘했다. 내려놓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