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사진 출처 미상>
"어여 뚫어~"
이정아
결혼을 하고 신접살림을 경기도 평택에 차렸다. 대학졸업 후 중등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어도 서울엔 자리가 없었다. 40년 전인데 지금과 비슷한세태였던게 희안하다. 아예 공립학교 순위고사에 '가정' 선생 티오가 없었다. 할 수없이 미션스쿨 연합회를 통해 가게 된 곳이 평택의 기독교 계통 사립 여학교였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홍교장선생님은 교사들의 원거리통근을 금하셨기에, 학교근처 학부형집의 방 한칸을 세 내어 살기로했다. 신랑은 고속버스로 여의도 까지 출퇴근 했다.
신혼부부인 아이의 담임선생이 이사온다니 미자아버지는 방도 새로 도배하고, 부엌타일도 연탄 보일러도 보수해 주셨다.
이사짐이 들어오는 날, 같은 집에 하숙한 동료교사들도 마당에 나와 구경을 했다. 장롱을 옮기던 인부들이 몇번을 들락거리더니 천정을 뚫어야 장을 안칠 수 있다고한다. 시골집이어서 천정은 낮고 장롱은 키가 커서 도리가 없단다. 모두들 한숨을 쉬며 걱정하고 있는데, 이윽고 진짜 집주인인 미자 할아버지가 결단을 내렸다.
"어여 뚫어~"
새로 도배한 핑크빛 천정을 뚫고 장롱을 안치니 모두 안도하였고, 입방 기념 짜장면 파티를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해주신 할아버지덕에 장롱을 마당에 뻗쳐놓지 않아도 되었다. 그 집에 사는 내내 여러모로 도움을 주셔서 부엌 한켠에 단독 샤워실도 만들 수 있었다. 방 한칸 월세의 설움은 기억에도 없다.
그 단칸 방에서 연탄가스를 맡아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고, 남편은 매일 등교하러 언덕을 오르는 아이들 사이를 뚫고 뛰어내려가 읍내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아침 조회를 하러 들어가면 학생들이 "오늘도 사부님이 곱슬머리 휘날리며 뛰어가셨다."고 깔깔거렸다.
"어여 뚫어~" 구수한 평택 사투리 뒤엔 가난한 신혼부부를 배려한 미자 할아버지의 마음이 들어있기에 그 시절을 추억하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예로부터 ' 서울, 개성, 수원' 3대 깍쟁이라 하다가 요즘은 안성과 평택까지 깍쟁이 범위에 들어 왔다던데, 내 경험으로 비추어 평택은 빼주고 싶다.
이사 나올때 얼마간의 천정 수리비를 드리긴했어도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그 후 미국에 와서 지지고 볶으며 산 지 30년이 넘었다. 이사에 얽힌 난감한 에피소드를 쓰라기에 지금에야 옛날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부부는 의견 충돌이 있거나 안 풀리면 "어여 뚫어~" 한다. 예전의 미자 할아버지의 뜻에서 많이 변질된 "네가 먼저 양보해~" 이뜻이 되고말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을 미자 할아버지는 우리의 대화속에서 배려와 소통의 상징으로 여전히 살아계신다. 나는 죽고 세상에서 사라져도, 남들에게 남겨질 기억을 생각하면 우린 잘 살아야한다.
Green essay 9,10월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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