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ete(삭제)하며 살기로 해요
이정아
의학저널에 실린 사례를 읽었다. 32권의 일기장을 간직하고 있는, 1965년생 미국인 질 프라이스 여인은 아주 어렸을 적 일들의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한단다. 연구팀이 일기장과 대조해 보니 다 맞았다고 한다. 너무 기억력이 좋아 '초능력자'라는 말도 들었지만 날이 갈수록 너무 많은 기억력으로 인해 생활이 불편해졌다며 의사와 상담을 한 것이다. 연구팀은 그녀의 증상을 '과잉기억증(Hyperthymetic Syndrom)'이라 칭했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흡사하다. 아주 오래된 일들이 마치 사진 찍어 놓은 듯 상자 속에 차곡차곡 있다가 나오는 것이다. 여고 동창들은 내가 가진 자신에 대한 기억을 무척 놀라워한다. 기억을 풀어내면 손뼉 치며 "그래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하며 좋아한다.
나의 기억력은 흔히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라고 불리는 것으로 눈으로 본 것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머릿속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암기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몽땅 기억하는 과잉기억 증후군과는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곱슬머리 Y가 새로 지은 도서관 유리문을 뚫고 나오려다 출입문이 깨졌다는 둥. 시청각실의 커튼 사이로 담장 너머 미 대사관 가족들의 선탠 모습을 엿보다가 걸린 이야기 등 미담보다는 망신 사건들이지만 곱씹는 재미가 크다. 남편의 동창 J선생도 자기 학교의 일을 남편보다 내가 더 잘 기억한다면서 감탄한다. 돌아보니 쓸데없는 기억을 남보다 잘하는 것으로, 그 부분의 뇌 용량을 공부에 썼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한다.
선행보다는 가십이 더 흥미롭고 기억에 남으니 아마도 남들은 나를 통해 씹는 카타르시스를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창회나 문인 모임, 교회의 구역예배나 친교시간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내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팬심들이 주변에 모인다.
가끔 내 기억력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부정한 일을 도모하거나, 거짓 학력이나, 가짜 등단, 표절, 사생활 문제 등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곳 문단에 속한 후 약 30년 간의 대소사를 거의 기억하니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내 기억 속에서 자신의 챕터를 지우고 싶은 것이다. 기억력 때문에 본의 아닌 악역을 담당하는 셈이다.
지난주 문단을 잘 아는 분과 이야기 중, 이곳의 한글 문학도 세대가 지나면서 끊길 텐데 그 역사를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내가 쓴다면 흑역사나 야사 쪽일 터여서 대답이 어려웠다.
새해를 맞아 내게 지우개 하나 있으면 좋겠다. 옐로페이퍼에나 나옴직한 이야기나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다 지워버리고 즐겁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감사만 넘치게 남은 생은 살고 싶다. 나쁜 기억은 오래가고 감사할 기억은 쉽게 잊는 것이 보통 사람이다.
"건강한 기억의 조건 중 하나는 적당한 건망증"이라고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에서 일찍이 설파하였다. 좋은 기억 저장소를 넓히려면 나쁜 기억의 삭제(delete)는 꼭 필요할 터이다. 새해엔 좋은 기억만 오롯이 하며 살고 싶다.
2020 격월간 그린 에세이 1,2월호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귤나무/이정아 (0) | 2020.03.12 |
---|---|
향기일까 냄새일까?/ 이정아 (0) | 2020.02.26 |
어머니가 보내준 내복/이정아 (0) | 2020.01.25 |
쥐의 해, 새 다짐/이정아 (0) | 2020.01.03 |
이민자의 아리랑, 천사 아리랑/이정아 (0) | 2019.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