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에 등단하신 원로시인을 만나뵈었다. 비행기 조종사, 신문기자, 농사꾼의 이력 속에서 꾸준히 시와 시조의 끈을 놓지 않으신 분이시다. 문력이 50년이 넘는 대선배이시다. 올해 초 미주문인 최초로 제대로 된 영문시조집 '사막시편(Desert Poems)'을 내시고, 지난 8월에 한국에서 제 14회 유심작품상을 받으셨다. 거금 1500만원이나 되는 상금을 다 쓰지 못하고 오셨다며 밥을 사셨다. "돈이 많이 남았어" 하시며. 물론 후배에게 밥을 사 주시려는 농담인 걸 알지만 상대를 편하게 하려는 배려가 전해진다.
다른 문인들은 "어렵다" "무섭다" 하는데, 내겐 오라버니같이 푸근하다. 내 마음대로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항공기 기장이었던 전력에 무한 존경을 보내는, 문학에 문외한인 남편이 아는 시인이기도 하다. 남편의 같은 고향 선배님이시다.
어려운 시절 다 지나고 자식농사도, 국제 영농 회사도 모두 성공하고 글로도 큰 수확을 거두셨다. "다 이루셨네요" 부러워하니 "아니 아니, 이제 시작이야" 하신다. 먹고 살고 아이들 교육하고 사업 일구느라 제대로 서재에 앉아 글 써본 기억이 없다며, 지금부터 정식으로 글만 쓰실 것이라고 새내기처럼 글 계획을 이야기하신다.
아, 50년 넘은 시력의 시인이 지치지도 않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니. 놀라웠다. 감동했다. 대체 그런 힘을 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노 시인의 새 다짐
이정아/수필가
[LA중앙일보] 09.09.16 21:12
해마다 각종 공모를 통해 문인이 쏟아져 나온다. 타이틀이나 상금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입상 후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당선작이 마지막 작품인 이들이 의외로 많다. 문인이라는 타이틀을 장신구 삼아 달고 문단의 모임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허명에 이끌려 시시한 문학상에 줄을 대고 로비하는 이들은 어찌나 많은지, 그 시간에 글을 쓸 일이다. 문학상을 받을 나이가 아니고 문학상을 줄 연조인 분들이 아직도 상에 연연하면 추하다. 모두 문학이 좋아 판에 뛰어들었지만 궁극엔 판을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있다. 그러기에 "진짜 글을 쓰려면 문단과 거리를 두라"고 의식있는 선배 문인들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글에 최선을 다했기에 모든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말했다. 그의 자신감이 치열함에서 나왔구나 생각했다. 하루키는 '시간에 의해 쟁취해 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란 믿음으로 30년 넘는 시간을 버텼다. 원로 시인이 50년 넘게 쓰고도 오히려 새 출발이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음도 문학에 바친 시간에 대한 자신감일 것이다.
문학이라는 답 없는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간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문학의 언저리 행사에 시간낭비 말고 글과 싸우는 시간이 길어져야 진짜 문학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나 따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송구하지만 말이다.
출처 : 국제 PEN 한국본부 미주 서부지역위원회
글쓴이 : 이정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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