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집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다
이정아/수필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친구 남편의 장례일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투병 중일 때, 같은 병원에 항암치료차 왔다가 내 병실에 들러 나를 격려하기도 했는데 하늘나라에 먼저 터를 잡은 것이다.
그 며칠 후 분당의 남동생집에 있던 나는 올케의 오빠 부음을 들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사돈도 같은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나보다 한 걸음 앞서 떠나신 것이다. 같은 병원에서 비슷한 시기에 어려움을 겪은 '동병생' 둘이 먼 길을 떠나니 맘이 더 아팠다.
수술 후 정기검진차 오는 한국 방문이 이번엔 국제 펜클럽의 '세계 한글 작가대회'와 날짜가 맞물려 참석하게 되었다. 경주에서 열린 대회에는 한국, 중국, 러시아, 남미, 미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한글로 문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었다. 공부와 담 쌓은 나는 수업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핑계를 만들어 땡땡이를 쳐야겠다는 욕망이 스멀거렸다.
마침 한국에서 쓰던 전화기가 고장이 났기에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중간에 나와 경주시내 KT 고객센터에 갔다. 유심(USIM)칩에는 문제가 없으니 전화기를 고쳐야 하는데 경주에는 애플스토어가 없으니 포항엘 가야 한단다.
나를 태우고 다니던 택시기사님의 조언으로 중고 전화기를 사기로 하고, 대신 시내관광을 했다. 대학 때 수업을 빼먹고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탄 기분처럼 설렜다. 경주 시내관광은 거의 무덤을 보는 거였다. 박혁거세를 비롯한 박씨 왕가의 오릉에서 천마총 등 30기의 대릉원을 거쳐 신라 석씨 시조인 탈해왕릉에서 끝났다.
도시 전체가 삶과 죽음, 고대의 역사와 현재의 삶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대도시와 달리 야단스럽지 않고 고즈넉했다. 곳곳의 둥근 고분들 사이에 서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죽음은 두렵거나 무서운 게 아니라 평안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KTX에서 이번 세미나의 초청연사인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애완견을 사이에 두고 인증샷 한장 찍고 악수했다. 그의 기가 조금 전해졌을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미리 준비해 간 Axt 창간호와 이병률의 여행 산문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었다. 열차에 비치된 서고에서는 원철스님이 쓰신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를 읽었다. "독서는 앉아서의 여행이고, 여행은 길에서 하는 독서이니 독서는 지식이고 여행은 사색이다. 독서로 혜안을 얻고 여행에서 개안한다." 이런 흐뭇한 글귀 하나 건졌다.
병원 결과가 좋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반가워한다. 특히 남편상을 당한 친구와 오빠상을 당한 올케가 더 좋아한다. 건강이 최고라는 걸 가까이서 체험한 까닭이리라.
추석을 한국에서 노모와 동생들과 함께 보냈다. 마음은 벌써 미국에 가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LA중앙일보] 발행 2015/10/02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5/10/01 20:05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4세 엄마의 레블론과 코티분 (0) | 2015.10.30 |
---|---|
'풀꽃시인'의 손님대접 (0) | 2015.10.18 |
100 Dollar Hamburger (0) | 2015.09.19 |
열매를 나누어요 (0) | 2015.09.19 |
세라비(C'est la vie), 이것이 인생 (0) | 2015.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