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블론 20개, 코티분 10갑.' 엄마의 주문서이다. 수술 후 검진차 자주 한국을 방문하는데 갈 때마다 필수로 가져가야할 물품이다.
남동생들이나 올케, 시누이들은 아픈 언니가 뭘 사오냐며 꼭 필요한 걸 말하래도 안한다. 그런데 84세의 노모는 "딴 건 다 필요없다"시며 레블론 파운데이션과 코티분은 꼭 가져오라신다.
사실 개수가 많지 크게 비싸진 않다. 동네 어귀의 체인점 월그린스에 가면 레블론은 1개 사면 두번째 것은 50% 하는 행사를 종종하니 그걸 이용하면 되고, 코티분도 한 갑에 10불 미만이므로 엄마의 주문이 부담이 되진 않는다.
그러나 2년 사이 다섯번 이상 나갈 때마다 가져다 드린 그 화장품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는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 말대로라면 84세 늙은이가 무슨 멋을 부리냐?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번 방문시엔 주로 어머니집에 있었기에 잘 살펴보았다. 엄마의 화장대엔 내가 쓰다가 두고 간 화장품과 한국제품의 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찌든 분첩과 휘어진 화장솔 등 구차하기까지 한 화장대였다. 어디에도 레블론과 코티분은 없다.
며칠을 두고보니 연신 나갔다 들어오시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교인 친구들 집에 다녀오시는 거였다. 화장품을 가방에 담아 나가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만난 노인들의 인사로 미루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미국서 오신 따님이 우리 선물까지 챙겨오시고 고마워요."
선물엔 마음이 깃들여야 하거늘 인사받기도 민망했다. 용도도 모르고 욕심 많은 노인네라며 엄마에게 투덜거리는 마음으로 사온 건데 말이다.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가는 병원 검진 길에 무거운 걸 주문한다고 속으로 얼마나 불평을 했던가.
다른 권사님들은 딸들이 한국에 살아 자주 찾아온다고들 한다. 딸들이 다녀가며 용돈도 주고 맛난 것도 사오면 나누고 했는데, 오랜만에 미국서 나온 딸이 아파서 수술을 받는다고 왔으니 엄마는 무척 속이 상했단다. 그분들이 모여 늘 나의 완쾌를 비는 기도를 한 덕에 수술이 잘 되었으니 엄마는 큰 빚을 졌단다.
사실 중보기도에 대한 복은 하늘에서 받는 것인데, 엄마는 무척 세상적인 답례 방법을 생각하셨나보다. 그런 엄마가 이해되었다. 미국사는 딸이니 미국 물건으로 그것도 노인들이 젊을 때 열광하던 레블론과 코티분으로 인사한다는 발상이 귀여웠다. 나 때문에 진 빚이니 당연히 내가 갚을 몫이다.
돌아오는 짐을 싸려니 엄마가 사 놓으신 식구대로의 속옷과 양말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내가 불평한 화장품보다 훨씬 무겁다. 우리 식구는 미국살이 30년 동안 엄마가 공급하는 속옷과 양말을 입고 신었다. 당연한 듯이.
"엄마, 다리도 시원찮은데 무거운 거 사러 다니지 마세요. 이젠 우리도 미제 속옷 사 입을게요. 그래도 레블론과 코티분은 제가 평생 공급할테니 염려마세요."
멀리 사는 것도 모자라 아픈 것으로 또 불효를 하고 있는 나는 2배 못난 딸이다.
84세 엄마의 레블론과 코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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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84세 엄마의 레블론과 코티분
이정아/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15/10/29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5/10/2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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