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늬 옷
이정아
3남 1녀의 고명딸인 나는 어머니가 각별히 생각하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늘 끼고 다니시던 책보에 들어있는 일본 주간지 ‘주간여성'을 열심히 보셨다. 우리나라에 주간지가 나오기 전이니 알록달록 선명한 화보가 인상적인 책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어머니는 일본 글을 아시니 열심히 보셨는데 내용은 주로 연예인들의 가십이었을 터이다.
가끔 어머니가 '기시 게이꼬(kishi keiko)'라는 일본 여배우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우아하고 옷도 잘 입고 이러시더니 어느 날 동네 양장점으로 날 데려가셔서 내게 옷을 한 벌 맞춰주셨다. 흰 바탕에 빨강 물방울무늬의 천으로 만든 원피스인데 앞의 가슴께는 단색 빨강으로 덧댄 알프스 소녀 같은 스타일이었다. 무덤덤 한 남편이 그 옷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꽤 인상적인 옷이었던 듯하다. 남편과의 첫 미팅 때 그 옷을 입고 나갔나 보다.
엄마 왈 '기시 게이꼬'는 물방울무늬 옷을 즐겨 입는다나? 그 뒤로도 검정에 흰 물방울 블라우스에 검정 스커트는 유니폼처럼 입고 다녔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끼 색에 검정 물방울 옷을 입고 대학 졸업사진을 찍었고, 미국으로 올 때 임신복으로 입은 옷도 색만 달랐지 땡땡이였으며, 영주권 사진은 흰 바탕에 검정 물방울 스탠드 컬러의 블라우스를 입고 찍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옷장에 물방울무늬 옷이 즐비하다. 지금 집에서 입고 있는 원피스도 하늘색 바탕에 흰색 작은 물방울이 있는 옷이다.
한술 더 떠서 내가 남편의 넥타이를 고를 때에도 물방울무늬 행진은 계속된다. 진한 푸른색에 흰 물방울은 여름용으로, 다크 브라운에 아이보리 닷은 가을용으로, 자주색에 파란 땡땡은 겨울용으로 애용하고 있다. 친구로부턴 베이지 바탕에 오렌지색 감인지 토마토인지가 물방울처럼 그려진 Hermes 넥타이가 남편의 생일선물로 보내져 왔었다. 나의 물방울 선호 취향을 아는 이의 선물인 것이다.
물방울... 땡땡이... 이곳에서는 polka dot이라고 불리는 이 무늬는 여성스럽고 경쾌한 이미지를 가진다고 어느 디자이너가 글에 쓴 것을 읽었다. 나와 여성스럽다는 건 조금 거리가 있을지 모르나 내가 생각해도 경쾌한 것 같긴 하다.
얼마 전 classic academy에 참석했더니 몇몇 분들이 “혹시 땡땡이 블라우스… 아니신가?” 하며 반갑게 묻는다. 신문에 물방울무늬 옷을 입고 찍은 프로필 사진을 썼던 탓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땡땡이 블라우스'가 내 별명이 되었다면 남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도 그러할 것이다. 기실 나는 잘 웃고 떠든다. 나의 글도 명랑하고 쾌활하다. '땡땡이 블라우스'처럼 살았다. 그렇다고 내가 속까지 없는, 생각 던지고 사는 푼수로 비쳐질까 걱정스럽다.
가을엔 많은 것들이 변하고 또 쓸쓸해진다. 푸른 산이 알록달록 옷을 갈아입지만 그건 화려한 변신이 아니라 겨울로 향하는 사추기의 변화일 것이다. 낙엽을 나뭇잎의 투신이라고 시인은 말하지 않던가? 결국 다 떨어져 앙상해질 것이다. 그건 외로움이다. 이 가을 단풍 들고 잎이 지고 또 세월이 갈 것이다. 앙상한 가지가 주는 외로움보다 가지 사이로 더 많은 하늘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
하늘이 높아져서 휑한 공간에 그리움을 사랑을 사색을 더 채워 놓고 싶다. polka dot도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내 맘이 이런 걸 보니, 아 가을이 곧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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